[숨-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편향적인 과거의 기억을 인식할 수 있다면
숨-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 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작가 '테드 창'의 두번째 단편집 '숨'중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
이 소설은 교차편집의 형식을 하고 있다.
이야기의 한쪽에서는 아프리카 씨족 사회의 부족원인 "지징기"가 유럽인 선교사를 통해서 문자를 배우게 된다.
다른 한쪽은 근미래에 생체 보조기억 장치 '리멤'을 사용하는 저널리스트인 "나"가 있다.
리멤은 과거의 기억들을 동영상으로 아카이브해서 과거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을 영상으로 다시 출력해 주는 디지털 보조 기억 장치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
그리고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중에서
지혜는 습득될 수 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편향적인지를 깨닫는 과정에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고 한다. 디지털 기억을 통해서 그런 편향적 사고를 줄일 수도 있지만 입맛대로(?) 변형된 과거의 기억 역시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리멤'-(디지털 보조 기억 장치의 이름)을 장착하고 나서 기억에 대한 주관이 사라지고 과거를 명백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까?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깊은 트라우마에 빠진 상태라면 기억을 조작해서 내가 원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프레임으로 과거의 사건을 대하느냐는 정작 현재의 내가 그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로 판단된다.
디지털 생체보조기억장치의 장단점
니콜이 16살 때 '나'와 갈등을 겪었던 일화를 보면 주인공, '나'의 기억이 사실과는 정반대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멤이란 최첨단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편향은 여전히 일어난다. 이러한 편향적 사고 혹은 선별적 기억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생체 보조기억 장치를 사용하게 되면 이런 편향된 사고를 조금은 객관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복해서 반성하고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부끄러움에 이불킥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싶은 당시의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린다면 그것은 축복이 될 수 없다. 망각이 작용하지 않게 된다.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그 근본은 망각일 텐데... 리멤을 사용하는 것이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문자를 배운 지징기가 집단의 기억의 편향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부족장인 사베와 의견충돌을 한다. 부족장 사베가 하는 말의 핵심은 부족의 이득을 위해서 꼭 사실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지징기는 이 말에 동의한다. 자신의 사고가 유럽인들의 문자를 배움으로서 부족의 정체성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 그 의미가 모두 다르게 적용된다.
사람이 성숙해지는 과정
니콜은 16살 때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만 그 원인이된 아빠를 용서하고 힘든 사실들을 극복해 낸다.
딸에게 아픈 기억을 준 주인공. 고통스러운 순간의 과거의 기억. 기억의 편향은 주인공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픈 기억을 극복했던 딸이나 이제서야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주인공이나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둘다 불행한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고 있다. 딸의 마음을 이제서야 헤아려줘서 다행이다. 그래도 니콜은 어찌되었건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서 누구의 잘못이라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인정을 했다는 것에 치유가 되고 둘의 관계는 개선될 것이다. 과거를 딛고 지금을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술
유튜브가 생기고 블로그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이 생기고 라디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자가 구전 문화를 없애지 못했지만 발달된 기술은 이전 기술을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구전 문화 만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자리에서 나란히 누워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전래동화는 구전 문화의 일부분이다. 과거의 기술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살아남는다. 블로그가, 라디오가 그렇게 살아남았고 더 유용한 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글, 사진, 동영상으로 이어져온 기억의 보조 장치들이 각기 다른 본질로 인식되어지고 공존하고 있다. 글과 독서를 통해 얻는 통찰력의 가치를 유튜브가 알려주는 지식으로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더 복잡해진다.
마무리
1.
영화 '컨텍트'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외계인의 문자와 관련된 내용이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 '내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만들었다. '컨텍트'를 인상깊게 봐서 테드 창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숨'은 사둔지 한참 지난 책이다. 오랜만에 꺼내서 책의 중간 쯤을 펼치고 읽었는데 그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었다. 생체보조기억 장치를 소제로 하는 SF소설이다. 무게가 깊다.
2.
구전으로 역사를 기술하던 시대에서 활자의 보편화가 거스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생체기억장치가 그 유용성을 인정받으면 문명은 또 한번 진보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활용된다면, 그것의 장점을 찾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지금 코로나로 어려운 세상. 코로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바뀐 세상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복구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그안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인류가 그렇게 진화했듯, 개개인이 이 힘든 시기를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슬기롭게 극복해야만 한다. 다음 세대에게 값어치 있는 기억으로 전달되어서 그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의미있는 기억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3.
다음 세대와 이어진 우리 삶을 생각하면 하루하루를 허투로 살 수 없다는 결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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