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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작가의 삶을 엿본다는 건...

◆◇○◎ 2021. 6. 23.

20대의 나와 30대의 나. 그리고 지금 40대의 나. 얼굴의 주름은 늘었지만 사고하는 능력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젊고 싱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겪었던 경험들과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래된 기억들이, 늘어나는 얼굴의 잔주름과 내 속에서 몰라보게 커진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성숙함과 맞바꾸며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 작가의 경험

 

박완서 작가의 수필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70이 넘는 나이가 되어서도 젊음에 전혀 꿀림이 없는 고귀함을 간직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이었습니다. 작가의 유년기의 기억들과 일상에서 느꼈던 소회들을 느끼다 보면 나 역시 이렇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됐습니다. 외손주로부터 단추만 한 민들레 꽃을 선물 받는 기쁨과 교감은 60대가 되어서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내내,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는 것. 내가 가진 것에 오롯이 감사하며 더 좋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님의 깊이

 

박완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와 남북 분단의 아픔을 직접 경험하신 분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이 일상이던 전쟁 시절 감수성 예민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죠. 그런 경험들이 그분의 생각 속에 녹아들어서 쓰시는 작품마다 풍성한 감성과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다듬어졌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 봅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배 곯던 시절을 거쳐 식도락을 만끽하는 시대를 사시다 가셨기 때문에 일상에 더욱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시대는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를 통해 개인 간의 단절과 외로움을 불러왔지만 모순되게도 그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더 없는 풍요의 시대가 됐습니다. 불만으로 가득 찬 초현대 사회에서 가난과 전쟁의 극복과 생존은 감개무량함을 넘어 그만 불행해지라는 충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도 되셨을 겁니다.

 

   20년쯤 전에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었습니다. 꽃과 같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나이에 겪은 죽음의 냄새와 가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전쟁 중에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읽은 사랑의 이야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책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고백하자면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됐고 이성을 대하는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편해지는 천재와의 관계보다는, 반짝이는 명석함은 없어도 서로 간에 한마디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과묵한 관계. 서로를 포근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이라는 사랑 한번 해본 적 없는 20살 애송이의 상상력을 자극했었습니다. 

 

작가의 기억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남존여비사상이 극심하던 시절의 불합리함,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의 묘사, 먼저 보낸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통찰이 아름다운 문체로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화려하진 않지만 구체적이고, 투박하지 않게 유려합니다. 작가의 내면을 농밀하게 고스란히 글로 표현했기 때문이겠죠. 더하지도 덜지도 않는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해서 적게 되는 글쓰기. 그런 글을 읽으므로써 얻게 되는 편안함.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을 읽으면서 글 짓는 이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으며 각박한 생활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았습니다. 소리내어 웃고, 가슴 찡하고, 안타깝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떠올랐어요. 박완서 작가는 글을 통해 독자의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최고의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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